치매 아빠의 ‘아빠’가 된 92년생 기현씨의 뭉클한 8년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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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평행복의집 작성일 19-11-22 14:50본문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tvN)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했었다.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더니….” 얼마간 위악의 감정이 뒤섞인 말이었지만 적지 않은 시청자는 이 대사에 공감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가족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삶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지고 가족이 징글징글하게 여겨지는 일을 한 번쯤은 겪게 된다.
최근 출간된 에세이 ‘아빠의 아빠가 됐다’(이매진)에 여일하게 흐르는 정서도 비슷한 감정이다. 책에서 화사하게 느껴지는 건 핑크빛 표지가 전부다.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간단없이 이어진다. 20대 청년이 적어 내려간 한숨의 기록이면서, 한국 사회의 안전망을 재고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저자를 소개한 책날개엔 이렇게 적혀 있다. “공돌이와 노가다를 거쳐, 메이커와 작가로 일하면서, 치매에 걸린 50대 아빠의 아빠로 살아가는, 1992년생 청년 보호자.”
책을 펴낸 청년은 조기현(27)씨다. 책날개에 담긴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빠의…’는 ‘치매 아빠’를 돌본 아들의 간병기라고 할 수 있다. 기현씨는 20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언젠가 책을 내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이 이뤄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억울한 감정, 부끄러운 기억을 글로 옮기면서 내 경험을 ‘사회화’하는 작업을 벌인 것 같다”며 “독자들이 나의 책을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받아들이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기현씨의 부모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 갈라섰다. 아빠는 기현씨를 떠맡았고 여동생은 엄마가 데려갔다. “가난한 집안이 으레 그렇듯 나눠줄 자원이 없으니 부모가 자식의 삶에 개입하는 법”이 없었다. 기현씨는 이런 ‘자유’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열아홉 살이던 2011년 아빠가 쓰러지면서 그의 삶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건설 현장 노동자였던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중환자실 입원비는 200만원. 결국 집 보증금에 손을 댔다. 아버지는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됐고, 기현씨는 아버지의 삶까지 걸머지게 됐다.
돈에 쪼들리고 애면글면 버티면서 9년을 보냈다. 기현씨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아빠는 어질러진 일상 속에서 때때로 내게 크게 화를 냈고, 나는 보답으로 물건을 때려 부쉈다. 한 시간쯤 지나면 또 같이 밥을 먹었다.” 그렇게 아들은 ‘아빠의 아빠’가 되었다. 아빠는 술에 의지했고 주야장천 막걸리를 마셨다.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 길길이 날뛰었다. 기현씨는 생각했다. ‘평생 돈을 벌어 아빠 병원비로 다 바쳐야 하는 걸까.’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했던 시절에 아빠는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
“아빠 치매라고! 정신 나갔다고!”
“쌍놈 새끼, 내가 알아서 살 테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병원비를 변통하려면 기초 생활 수급자가 돼야 했으나 쉽지 않았다. 주민센터 직원이 귀띔한 꼼수로 아빠는 수급자 타이틀을 거머쥐었는데 이번엔 요양병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61년생인 아빠는 병원이 싫어하는 유형의 환자였다. 젊고, 치매가 있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기현씨는 “병원은 보이지 않는 국경이 돼 철저한 입국 심사를 했다”고 썼다. 가까스로 병원을 찾았지만 이번엔 병원 입구에서 사달이 났다. 아빠는 집에 갈 거라고 몽니를 부렸다. 아들은 아빠의 멱살을 잡았다. “간병비만 300만원 넘게 썼어! 그런데 왜 말을 안 들어! 왜!”
책에 담긴 아릿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옮기도록 하자. 기현씨는 자신을 의젓한 청년이라고, 보기 드문 효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연민과 동정은 기현씨의 9년을 ‘효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려서다. 무엇보다 기현씨의 책은 대한민국에서 가난과 돌봄의 민낯이 어떻게 생겼는지 드러낸다. 그런데 기현씨는 왜 아버지를 보살피며 살아왔을까.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였을까.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를 돌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내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족 관계 증명서’가 있듯이, 아버지와 나의 돌봄 기간을 증명하는 ‘시민 관계 증명서’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 관계 증명서는) 가족이라고 말해지기 전에 우리는 하나의 ‘사회’라고 선언한다.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기현씨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지 물으려고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자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돌봄의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에서 논의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아울러 돌봄 문제가 아니더라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고민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현씨는 요즘 아버지의 미장 기술을 담은 다큐멘터리 ‘1포 10㎏ 100개의 생애’를 만들고 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최근 출간된 에세이 ‘아빠의 아빠가 됐다’(이매진)에 여일하게 흐르는 정서도 비슷한 감정이다. 책에서 화사하게 느껴지는 건 핑크빛 표지가 전부다.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간단없이 이어진다. 20대 청년이 적어 내려간 한숨의 기록이면서, 한국 사회의 안전망을 재고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저자를 소개한 책날개엔 이렇게 적혀 있다. “공돌이와 노가다를 거쳐, 메이커와 작가로 일하면서, 치매에 걸린 50대 아빠의 아빠로 살아가는, 1992년생 청년 보호자.”
책을 펴낸 청년은 조기현(27)씨다. 책날개에 담긴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빠의…’는 ‘치매 아빠’를 돌본 아들의 간병기라고 할 수 있다. 기현씨는 20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언젠가 책을 내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이 이뤄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억울한 감정, 부끄러운 기억을 글로 옮기면서 내 경험을 ‘사회화’하는 작업을 벌인 것 같다”며 “독자들이 나의 책을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받아들이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기현씨의 부모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 갈라섰다. 아빠는 기현씨를 떠맡았고 여동생은 엄마가 데려갔다. “가난한 집안이 으레 그렇듯 나눠줄 자원이 없으니 부모가 자식의 삶에 개입하는 법”이 없었다. 기현씨는 이런 ‘자유’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열아홉 살이던 2011년 아빠가 쓰러지면서 그의 삶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건설 현장 노동자였던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중환자실 입원비는 200만원. 결국 집 보증금에 손을 댔다. 아버지는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됐고, 기현씨는 아버지의 삶까지 걸머지게 됐다.
돈에 쪼들리고 애면글면 버티면서 9년을 보냈다. 기현씨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아빠는 어질러진 일상 속에서 때때로 내게 크게 화를 냈고, 나는 보답으로 물건을 때려 부쉈다. 한 시간쯤 지나면 또 같이 밥을 먹었다.” 그렇게 아들은 ‘아빠의 아빠’가 되었다. 아빠는 술에 의지했고 주야장천 막걸리를 마셨다.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 길길이 날뛰었다. 기현씨는 생각했다. ‘평생 돈을 벌어 아빠 병원비로 다 바쳐야 하는 걸까.’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했던 시절에 아빠는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
“아빠 치매라고! 정신 나갔다고!”
“쌍놈 새끼, 내가 알아서 살 테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병원비를 변통하려면 기초 생활 수급자가 돼야 했으나 쉽지 않았다. 주민센터 직원이 귀띔한 꼼수로 아빠는 수급자 타이틀을 거머쥐었는데 이번엔 요양병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61년생인 아빠는 병원이 싫어하는 유형의 환자였다. 젊고, 치매가 있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기현씨는 “병원은 보이지 않는 국경이 돼 철저한 입국 심사를 했다”고 썼다. 가까스로 병원을 찾았지만 이번엔 병원 입구에서 사달이 났다. 아빠는 집에 갈 거라고 몽니를 부렸다. 아들은 아빠의 멱살을 잡았다. “간병비만 300만원 넘게 썼어! 그런데 왜 말을 안 들어! 왜!”
조기현씨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작성해야 했던 각종 진단서나 정산서를 촬영한 사진이다. 그는 "온갖 서류들이 가난의 경로를 따라다닌다"고 말한다. 이매진 제공
책에 담긴 아릿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옮기도록 하자. 기현씨는 자신을 의젓한 청년이라고, 보기 드문 효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연민과 동정은 기현씨의 9년을 ‘효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려서다. 무엇보다 기현씨의 책은 대한민국에서 가난과 돌봄의 민낯이 어떻게 생겼는지 드러낸다. 그런데 기현씨는 왜 아버지를 보살피며 살아왔을까.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였을까.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를 돌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내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족 관계 증명서’가 있듯이, 아버지와 나의 돌봄 기간을 증명하는 ‘시민 관계 증명서’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 관계 증명서는) 가족이라고 말해지기 전에 우리는 하나의 ‘사회’라고 선언한다.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기현씨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지 물으려고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자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돌봄의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에서 논의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아울러 돌봄 문제가 아니더라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고민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현씨는 요즘 아버지의 미장 기술을 담은 다큐멘터리 ‘1포 10㎏ 100개의 생애’를 만들고 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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